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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에도 ‘쪽’ 대본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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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에도 ‘쪽’ 대본 있었네~
[중앙일보 이경희]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그날밤 金中령 夫婦가 쓴 生命의 記錄集, 그 日記帳을 숨가쁘게 읽어갔읍니다. 一九誤0年前後 것을 읽으면서 나는 눈물이 핑 도는 場面을 몇 군데나 스쳤읍니다.” 1950~60년대 라디오 드라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스타 작가 한운사의 ‘이 생명 다하도록’(58년) 대본이다. 육필로 바삐 써내려 간 원고에 드문드문 한자가 박혀 있다. 긴 해설에 대사가 간간이 끼어드는 구성이라 방송 대본이라기보다 존대어로 쓴 소설 같다.
한국방송작가협회(이사장 박정란)가 이렇게 잊혀진 방송대본들을 디지털화해 서비스하는 ‘방송대본 디지털 도서관’(www.daevon.or.kr)을 15일 개관한다. 흘러가면 그뿐이라던 방송이 곰팡이 핀 대본 덕에 되살아났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반갑다. 개관에 앞서 옛 대본들을 미리 들춰봤다. 그 속엔 그 시절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손으로 원고 쓰던 시절=50~70년대에는 육필 원고가 일반적이었다. 90년대까지도 손으로 쓰는 것을 고수한 작가들이 있었다. 펜으로 시커멓게 줄을 죽죽 그어 거칠게 수정한 대본도 있고, 자를 대고 칸을 나눈 뒤 정자로 또박또박 써내려 간 대본도 있었다. 작가의 스타일이 그대로 나타나는 셈이다.
한운사씨는 “육필 원고엔 활자로 된 글과 달리 생명이 있는 것 같다”며 “마감이 닥쳐야 글이 나오는 스타일이라 성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육필 원고를 넘기면 타이피스트가 타이프를 쳐 인쇄해 성우들에게 나눠줬다. 다급할 땐 육필 원고를 그냥 인쇄하거나, 녹음하면서 원고를 몇 장씩 나오는 대로 전달하며 빠듯하게 쓴 적도 있다. 그래도 내 필체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쉽게 알아봤다.” 50년대 식 쪽대본(몇 장씩 끊어서 나오는 대본)인 셈이다.
라디오 대본은 소설·TV극·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당시 제일 큰 기업이던 건빵 회사가 스폰서였다”고 말했다. ‘이 생명 다하도록’은 신상옥 감독이 150만원에 사갔다. 월급이 1만원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 있다’ 영화 판권은 김기영 감독이 350만원에 구매했다. 관객 10만 명이 넘으면 더 주기로 해 총 500만원을 챙겼다. 당시에도 ‘러닝 개런티’가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사라진 달구지꾼=“날라리 꼭지가 정유의 입술에 애무지게 붙자 날라리의 나팔로부터 귀가 쨍 하니 호적소리가 드높게 엮어진다.”(작가 리보라, 삿갓마을의 전설 달구지꾼, 65년)
여기서 날라리는 건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악기 태평소를 가리킨다. 달구지꾼에 소품 날라리까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유모어 극장’ 대본엔 3대가 사는 집안 며느리가 누가 볼세 라 남편의 밥에 주워온 날계란을 묻어둔 대목이 나온다. 요즘엔 식중독 우려 때문에 기피하는 날달걀이 그땐 최고의 영양제였다.
‘통금 없어진 날’(박서림, 82년)처럼 엄혹했던 시절의 추억이 담긴 프로그램도 있고, ‘병은 의사에게’(박서림, 87년)라는 계몽적인 이야기도 있다. 88올림픽에 온 나라가 집중하던 시절엔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로 가꾸기-사랑의 꽃길’(이은집, 88년)이 연중기획 특별 생방송으로 라디오 전파를 탔다.
‘8·15 특집극 3부작-마돈나여 廣野(광야)에서 별을 노래하라’(김항명, 84년)라는 거창한 TV극 제목도 눈에 띈다. 라디오 대본 ‘실직 시름 노래로 달래세요’(구혜경, 98년)에선 IMF 외환위기 직후의 고단했던 삶이 읽힌다. 작가 경력 40년인 박정란 이사장은 “‘쥐를 잡자’는 캠페인을 할 만큼 뒤떨어지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다. 시대별로 생활상이 많이 달라졌고, 어휘도 크게 변화했다”고 돌아봤다.
◆‘수사반장’에도 과학수사가 있었다=“(김주임에게)용의주도한 놈들 같은데요? 테이프에 자기들 음성은 한마디도 안 넣었으니….”(한대희, 88년) 장수 드라마 ‘수사반장’ 중 한 대목이다. ‘CSI 과학수사대’ 정도는 아니지만 과학적인 요소가 있었다. 형사들은 유괴범이 아이의 음성을 녹음해 전달한 테이프에서 소음만 분리해 ‘삐뽀’란 소리를 잡아낸다. 우연히(!) 용의자의 집에서 ‘삐뽀’ 소리가 나는 인형을 건드렸던 노 순경이 범인을 지목한다.
그러나 당시 수사반장은 과학수사보다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 사라진 인간성에 대한 아쉬움에 좀 더 비중을 뒀다.
“정일이는 그런 비뚤어진 값싼 사랑마저도 받지 못한 외로운 아이였어요. 그애가 있는 곳은 언제나 계단 한 귀퉁이 아니면 아스팔트 광장 한 모퉁이에 외롭게 앉아 있었어요. 정일이는 이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의 희생자였어요.”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됐던 유 선생의 대사엔 비장미가 흐른다. 그는 부모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를 따로 챙겨주다 의심을 샀다.
박정란 이사장은 “지금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이 각광받지만 옛날엔 문학적인 작품이 좋은 대본이었다”고 말했다. “서서히 변화한 거라 의식하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보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성우들이 더빙한 옛날 영화를 보면 웃음이 나는 것처럼 방송도 그런 거죠.”
이경희 기자
가장 오래된 대본은 1956년 ‘물 한 모금’
2800여 작품 모아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수집한 최고(最古) 대본은 고(故) 이경재 작가의 라디오극 ‘물 한 모금’(1956년)이다. 희귀 대본인 ‘아씨’ ‘현해탄아 잘 있거라’, 최초의 주말드라마 ‘결혼행진곡’ ‘수사반장’ 등도 일부 모았다. 작가 1167명의 2800여 작품으로 총 1만500여 권, 20만 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방송 80년사 중 50년사는 얼추 구성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방송대본수집기록보존사업추진단 류시균 단장은 “하나 둘 작고하는 작가들이 늘어가기 때문에 유고 작가의 대본을 우선순위에 뒀다”고 말했다. 방송작가협회 남애리 상임이사는 “딸들은 보관을 잘하는 반면, 아들들은 대개 대본을 분실한 점이 특짹이라고 설명했다.
고 남지연 작가의 딸은 대본은 물론 시놉시스와 구상 낙서까지 보관해 왔다. 김영수 작가의 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도 원고를 챙겼다.
이렇게 모은 대본 1만여 권 중에서 6분의 1에 해당하는 자료가 우선 서비스된다. 육필 원고는 원본을 살려 스캐닝한 이미지를 올리고, 타이핑 원고는 전문을 입력해 e-북 형태로 만들었다.
남 이사는 “20세기 한국인의 생활사나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 콘텐트 수출 등 데이터를 활용할 곳이 많다”며 “관계 당국의 지속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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